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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총장연설문


2024학년도 개교기념미사 강론

  • 작성자 :비서실
  • 등록일 :2024.05.27
  • 조회수 :95

(2024.5.24. 금, 컨퍼런스룸 오전 11시)


2024학년도 개교기념미사 강론


주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독서: 사도행전 1,6-8

복음: 요한 12,24-25



오늘 우리는 가톨릭대학교 개교 169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이 미사 중에는 우리 대학의 설립자이신 요셉 암브로이즈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1808-1857) 신부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대학이 오늘날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모아 함께 기도합시다. 


작년에 파리 가톨릭대학교를 방문한 길에 저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파리외방선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우리 대학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신 요셉 암브로이즈 메스트르 신부님께서 이곳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1808년 프랑스 동쪽에 있는 안시(Annecy)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스물네 살 때 사제품을 받고 7년 동안 본당신부를 하시다가 파리외방선교회에 입회하셨습니다. 파리외방선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의 지침에 따라 1658년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선교 단체입니다. 프랑스 전국에서 모여든 신앙 깊은 사제들은 선교지로 떠나기에 앞서 이곳에서 일정 기간 준비했습니다. 


그곳 경당에는 인상적인 그림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샤를 드 쿠베르탱(Charles de Coubertin, 1822–908) 남작의 그림 「선교사들의 출발」(1868)입니다. 이 그림은 1864년 네 명의 선교사가 조선으로 떠나기에 앞서 당시 그 경당에서 거행되었던 파견예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네 명의 선교 사제는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배를 타고 희망봉과 인도양을 거쳐 1865년 6월에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일어난 병인박해(1866) 때 이들은 새남터와 갈매못에서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파리외방선교회를 떠난 지 고작 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화가 쿠베르탱 남작은 순교한 네 명의 사제를 기리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선교지는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결코 떠날 수 없을 만큼 위험천만한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이곳을 떠나기에 앞서 그 나라에 뼈를 묻는다는 결연한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께서 그곳에 입회하던 해인 1839년에 조선에서는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박해 때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 샤스탕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모두 참수당하셨고 이를 포함해서 119명의 천주교인이 순교했습니다. 선교지의 상황이 이렇게 위험천만했는데도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입회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선교지로 떠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 극동대표부에서 경리책임자로 잠시 일하면서 한국 신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 김대건과 두 번째 사제 최양업도 그곳에서 메스트르 신부님께 가장 많이 배웠습니다. 


조선의 선교를 자원했던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신학생 김대건과 함께 1842년 2월 16일 장밥티스트 세실(Jean-Baptiste Cecille)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에리곤(Érigone)호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아편전쟁때문에 뱃길이 막혀 필리핀 마닐라에 2개월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때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김대건 학생에게서 조선말을 배웠습니다. 두 달 후, 배는 조선으로 향했지만 에리곤호 함장 세실이 경로를 바꾸는 바람에 조선 입국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4년 후 이번에는 최양업 부제와 함께 조선의 동북 국경을 통해서 입국하려 했습니다만 만주에서 군인에게 체포되어 또 조선 입국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최양업 부제와 함께 또다시 조선으로 향하는 군함을 탔습니다. 그런데 전라도 연안 고군산도(古群山島)부근에서 배가 좌초되어 작은 섬에서 얼마간 체류하다가 상해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10년 동안 때로는 바다로 때로는 육로로 모든 경로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가 최종적으로 1852년 8월 29일 중국 배를 타고 서해안 고군산도를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선의 3대 교구장이었던 페레올 주교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그래서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다음 교구장이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교구장을 대신해서 조선교구를 책임지는 장상직(長上職)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조선교구를 책임지고 있던 바로 이 시기 1855년 충북 제천 베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당시 그곳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장주기 요셉이 자신의 집을 신학교 교사로 쓸 수 있게 내주었고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라틴어,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푸르티에 신부님(Pourthie, Jean Antoine, 1830∼1866)이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님(Petitnicolas, Michel Alexandre, 1828~1866)이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 요셉 신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근대식 서양 학문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대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성 요셉 신학교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신 후, 새로 부임하신 베르뇌 주교님의 지시로 충청도 내포 황무실의 교우촌으로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목하시다가 건강을 잃고 몸져누우신 후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고 1857년 12월 20일 그곳에 묻히셨습니다. 이때 그분의 나이는 마흔아홉이었고 신학교를 설립하신 지 불과 2년만이었습니다. 그 후 그분의 유해는 1970년 합덕 성당의 경내로 이전되었다가 2003년 대전 신학교 성직자 묘지에 이장되셨습니다. 


저는 오늘 개교기념 미사를 지내면서 메스트르 신부님의 외로운 결단을 생각합니다. 교회와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 한국 교회의 미래는 한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그분의 안목과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가톨릭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께서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스승이며 교육자로서 선교 열정이 넘치는 신앙 깊은 선교사였으며 조선사람을 사랑하시던 목자셨습니다. 그분의 신앙, 안목과 결단이 우리 대학 설립의 바탕입니다. 현재의 가톨릭대학교를 계속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 역시 신앙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그리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지와 결단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169년 전 메스트르 신부님께서 이 땅에 심으셨던 밀알 하나가 오늘날 어머 어마하게 큰 나무로 성장해 숲을 이루었습니다. 3개 교정, 5개 단과대학, 4개 학부, 43개 학과, 학사과정과 대학원을 포함해서 총 11,072명의 학생이 재학하는 종합대학으로 성장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처럼 우리 대학 구성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우리 대학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